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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명소] "본향을 사모하다" 대구 모명재

기사승인 2022.05.28  07: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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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위치한 '모명재' 안내판. [사진=포커스데일리]

(대구=포커스데일리) 홍종오 기자 = 대구명소 첫 번째 이야기, 타향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의 본향을 평생 그리워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

대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수성구 달구벌대로 만촌네거리에서 지하철 2호선 담티역 중간 대로와 인접한 형제봉자락 아래 명당자리에 모명재와 두사충 묘소가 있다.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1592) 때 중국 명나라 장수로 참전했다가 귀화한 두사충(杜師忠)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사당이다.

모명재의 ‘모명’은 두사충의 호로,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의미다.

모명재의 기둥에는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써 준 한시(漢詩)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두복야에게 바친다)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복야는 두사충의 관직이다.

중국 두릉(杜陵) 출신으로 시성 두보(杜甫)의 후손이기도 한 두사충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부관(지리참모)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그는 조선군과 긴밀한 전략협의를 했고, 그 과정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매우 가까워졌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정유재란(1597)이 일어나자 진린(陳璘) 도독의 비장으로 다시 참전했다. 이때 두사충은 이순신과 다시 만나게 된다.

타향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의 본향을 평생 그리워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

이순신은 외국 장수가 두 번이나 만리타국 조선의 전쟁에 참전해 도와준 그와 마음이 통해 시를 한 수 지어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함께 하고(北去同甘苦)/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했네(同來共死生)/ 성곽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城南他夜月)/ 오늘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今日一盃情)’. 이 시는 현재 모명재에 주련으로 걸려있다.

두사충은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나자 매부이기도 한 진린을 압록강까지 마중한 뒤 자신은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귀화했다. 장차 명나라가 망할 것을 감지한 그는 귀화 후 대구에 정착했다. 처음에 경상감영공원 일대의 땅을 하사받았는데, 경상도 감영이 그곳에 들어서면서 계산동 쪽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고국에 두고 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 얼마 후 대덕산 밑으로 주거지를 다시 옮기고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으로 지었다.

타향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도 자신의 본향을 평생 그리워한 명나라 사람 두사충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본향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마음을 떠올려 본다.

 

 

홍종오 기자 focusdaegu@ifocus.kr

<저작권자 © 포커스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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